그들에게는 신성한 곳인지 모르지만 우리에게는 단지 보는 즐거움 뿐
우리 찬구들 만이 아니라 함께 움직인 사람들과 함께. 8번궁 신사 앞에서
오래된 고목앞에서. 그렇다고 사람이 고목은 아닙니다.
지장보살님을 모신 절이라는데, 절이라기 보다는 납골당이라고 하는 것이 맞을 듯
대웅전앞에서
최익현 선생이 돌아가시고 시신을 모셨던 자리라고 합니다.
대마도에서의 마지막 점심. 역시나 짜더군요.
바닷물과 만나는 하수구인데 가뭄탓인지 바닷물이 올라온 모양입니다. 더불어 복어까지
일본에서 100대 해수욕장에 속한다는데, 우리나라 아무곳의 바다보다 못해 보였습니다.
해수욕장보다는 요런 이상한 돌들이 더 아릅다웠습니다.
해수욕장에서 단체로
우리나라 사람이 음료수 장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세종 1년 태종의 대마도 제3차 정벌
원인
1418년(태종 18)에 대마도는 큰 흉년이 들었다. 당시 대마도주(對馬島主)인 종정무(宗貞茂, 일본어: 소 사다시게) 또는 종정아(宗貞芽)가 죽고 아들 종정성(宗貞盛, 일본어: 소 사다모리)가 뒤를 잇게 되었는데, 흉년이 들어 식량 문제가 심각해지자 크게 들고 일어나 명나라의 해안 지역으로 가던 도중, 조선의 비인(庇仁)·해주(海州) 해안 지역을 약탈하게 되었다. 조선은 이때 승계한 새 도주인 종정성이 왜구를 선동한 것이라고 의심하여 직접 쓰시마 섬을 치는 방법을 강구하게 되었다. 이때 기록을 보면, 명나라로부터 돌아오는 왜구를 중간에서 공격하는 방법과 쓰시마 섬의 본거지를 치는 두 가지 방법을 논의한 것으로 나온다.
1419년(세종 1년) 6월 9일, 상왕이 된 태종은 대마도를 정벌할 것을 중외(中外)에 교유하였다.
경과
당시 왕위를 세종에게 물려주고 상왕이 된 태종은 아직 군사에 관한 결정을 직접하고 있었다. 태종의 주도 아래 장천군 이종무를 삼군 도체찰사로, 영의정 유정현을 삼도 도통사(三道都統使)로, 의정부 참찬 최윤덕을 삼군 도절제사(三軍都節制使)로 명하고, 우박(禹博), 이숙묘(李叔畝), 황상(黃象)을 중군 절제사, 유습(柳濕)을 좌군 도절제사, 박초(朴礎)와 박실(朴實)을 좌군 절제사로, 이지실(李之實)을 우군 도절제사로, 김을화와 이순몽(李順蒙)을 우군 절제사로 삼아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의 3도에 있는 병선 227척과 병사 1만7천 명을 거느리고 음력 4월에 출병하도록 명하였다.
1419년(세종 1) 음력 6월 19일 거제도 남쪽 주원방포를 출발하여 20일에 쓰시마 섬에 도착하였다. 이종무는 도주 종정선에게 항복을 권하였으나 대답이 없자 왜구를 수색하여 1백여 명을 참수하고 2천여 호의 가옥을 불태웠다. 131명의 명나라 포로를 찾아내었다. 29일에는 가옥 70여 호를 태우고 명나라 사람 15명과 조선인 8명을 구출하였다.
이종무 장군은 좌군과 우군에게 두지포에 포진하라 명령하고 자신은 음력 7월 3일에 주력함대(舟師)를 이끌고 거제도로 철수했다. 대마도에 하륙한 지 13일만이다. 정벌군 지휘부를 일단 빼낸 태종은 병조판서 조말생으로 하여금 대마도 도주에게 항복 권고문을 보내도록 했다.
상왕이 병조 판서 조말생에게 명하여, 대마도 수호 도도웅와에게 글을 보내어 말하기를,
"본조가 계하여 선지(宣旨)를 받들어 이르노니, 거기에 이르기를, ‘하늘이 이 백성을 내실 때에 기운으로 형체를 이룩하고, 이치도 또한 품부하여 주었으니, 착한 일을 하면, 백 가지 상서를 내리고, 불선한 일을 하면, 백 가지 재앙을 내리나니, 옛적 제왕이 천도(天道)를 받들어 백성에게 곡식을 심고 거두는 것을 가르쳐서, 오곡을 길러서 그 몸을 기르는 것이다. 그 고유한 의리를 좇아 깨쳐서 인도하여, 그 마음을 착하게 하는 것이니, 만일 굳세게 버티어 굽히지 않고 사람을 재물로써 죽이고 짓밟아서 민망하게도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작으면 형벌하여 죽이고, 크면 정벌하여 없애는 것이 요(堯)·순(舜)과 삼왕의 사람의 임금 노릇하는 법이 이와 같을 뿐이다. 대마도라는 섬은 경상도의 계림(鷄林)에 예속했으니, 본디 우리 나라 땅이란 것이 문적에 실려 있어, 분명히 상고할 수가 있다. 다만 그 땅이 심히 작고, 또 바다 가운데 있어서, 왕래함이 막혀 백성이 살지 않는지라, 이러므로 왜인으로서 그 나라에서 쫓겨나서 갈 곳이 없는 자들이 다 와서, 함께 모여 살아 굴혈을 삼은 것이며, 때로는 도적질로 나서서 평민을 위협하고 노략질하여, 전곡(錢穀)을 약탈하고, 마음대로 고아와 과부, 사람들의 처자를 학살하며, 사람이 사는 집을 불사르니, 흉악 무도함이 여러 해가 되었으나, 우리 태조 강헌 대왕(太祖康獻大王)께서는 지극히 어질고 신무(神武)하시므로, 하늘 뜻에 응하여, 혁명을 일으켜 비로소 집[家]으로 이루어진 나라를 창조하매, 저자와 전포도 변함이 없이 큰 기업(基業)이 정하였졌으니, 이것이 비록 탕임금과 무왕의 성덕이라 할지라도, 어찌 여기에서 더하겠는가.
국세가 크게 확장되고 병력이 뛰어나게 충실하니, 산과 바다를 뚫어서 통하게 할 수도 있고, 천지를 뒤흔들게 할 수도 있으니, 높고도 높으며 성하고도 성함이여, 대저 혈기있는 자 두려워서 굴복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이때를 당하여, 한 편장(褊將)을 명하여, 대마도의 작은 추한 놈들을 섬멸하게 하니, 마치 태산이 까마귀 알을 누르는 것과도 같고, 맹분(孟賁)·하육(夏育)같은 용사가 어린아이를 움키는 것과도 같으나, 우리 태조께서는 도리어 문덕을 펴고, 무위(武威)를 거두시고, 은혜와 신의와 사랑과 편안케 하는 도리를 보이시니, 내가 대통을 이어 나라에 임한 이래로 능히 전왕의 뜻을 이어서, 더욱 백성을 측은한 마음으로 사랑하고, 비록 조그마한 공손하지 못한 일이 간혹 있어도, 오히려 도도웅와의 아비 종정무(宗貞茂)의 의를 사모하고 정성을 다한 것을 생각해서, 범하여도 교계(較計)하지 않았으며, 통신하는 사신을 접할 때마다 사관(使館)을 정하여 머물게 하고, 예조에 명하여 후하게 위로하고, 또 그 생활의 어려움을 생각하여, 이(利)를 꾀하는 상선(商船)의 교통도 허락하였으며, 경상도의 미곡을 대마도로 운수한 것이 해마다 대개 수만 석이 넘었으니, 그것으로 거의 그 몸을 길러 주림을 면하고 그 양심을 확충하여, 도적질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천지 사이에 삶을 같이할까 하였노라. 나의 용심(用心)함도 또한 부지런히 하였더니, 뜻밖에도 요사이 와서 배은 망덕하고 스스로 화근을 지으며, 망함을 스스로 취하고 있으나, 그 평일에 귀화한 자와 이(利)를 얻으려고 〈무역하거나〉 통신 관계로 온 자와, 또 이제 우리의 위풍(威風)에 따라 항복한 자는 아울러 다 죽이지 아니하고, 여러 고을에 나누어 두고서 먹을 것 입을 것을 주어서 그 생활을 하게 한 것이며, 또 변방 장수에게 명하여, 병선을 영솔하고 나아가서 그 섬을 포위하고 모두 휩쓸어와 항복하기를 기다렸더니, 지금까지도 그 섬 사람들은 오히려 이럴까 저럴까 하며 깨닫지 못하고 있으니, 내 심히 민망히 여긴다. 섬 가운데 사람들은 수천에 불과하나, 그 생활을 생각하면, 참으로 측은하다. 섬 가운데 땅이 거의 다 돌산이고 비옥한 토지는 없다. 농사하여 곡식과 나무를 가꾸어서 거두는 것으로 공(功)을 시험할 곳이 없으므로, 장차 틈만 있으면, 남몰래 도적질하거나, 남의 재물과 곡식을 훔치려 하는 것이 대개 그 평시에 저지른 죄악이며, 그 죄악이 벌써부터 가득차 있는지라, 어두운 곳에서는 천지와 산천의 신이 묵묵히 앙화를 내리고, 밝은 곳에서는 날랜 말과 큰 배며, 날카로운 병기와 날쌘 군사로써 수륙의 방비가 심히 엄하니, 어디가서 주륙(誅戮)의 환을 만나지 아니할 것인가. 다만 고기 잡고, 미역 따고 하여 매매하는 일은 이에 생활의 자료가 되는 바인데, 이제 와서는 이미 배은하고 의를 버려 스스로 끊는 것이며, 내가 먼저 끊을 마음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 세 가지를 잃은 자는 기아를 면치 못할 것이며, 앉아서 죽기를 기다릴 뿐이니, 이에 대하여 계책하기도 또한 어려운 일이다.
만약 능히 번연(飜然)히 깨닫고 다 휩쓸어 와서 항복하면, 도도웅와는 좋은 벼슬을 줄 것이며, 두터운 녹도 나누어 줄 것이요, 나머지 대관들은 평도전(平道全)의 예와 같이 할 것이며, 그 나머지 여러 군소(群小)들도 또한 다 옷과 양식을 넉넉히 주어서, 비옥한 땅에 살게 하고, 다 같이 갈고 심는 일을 얻게 하여, 우리 백성과 꼭 같이 보고 같이 사랑하게 하여, 도적이 되는 것이 부끄러운 것임과 의리를 지키는 것이 기쁜 일임을 다 알게 하여, 이것이 스스로 새롭게 하는 길이며, 생활하여 갈 도리가 있게 되는 것이라, 이 계책에서 나가지 아니한다면, 차라리 무리를 다 휩쓸어서 이끌고 본국에 돌아가는 것도 그 또한 옳을 일이어늘, 만일 본국에 돌아가지도 아니하고 우리에게 항복도 아니하고, 아직도 도적질할 마음만 품고 섬에 머물러 있으면, 마땅히 병선을 크게 갖추어 군량을 많이 싣고 섬을 에워싸고 쳐서 오랜 시일이 지나게 되면, 반드시 장차 스스로 다 죽고 말 것이며, 또 만일 용사 10여 만명을 뽑아서 방방곡곡으로 들어가 치면, 주머니 속에 든 물건과 같이 오도가도 못하여, 반드시 어린이와 부녀자까지도 하나도 남지 않을 뿐만 아니라, 육지에서는 까마귀와 소리개의 밥이 되고, 물에서는 물고기와 자라의 배를 채우게 될 것이 의심 없으니, 아, 어찌 깊이 불쌍히 여길 바 아니겠는가, 이것은 화복의 소재가 소소하게 밝은 일이어서, 망매(茫昧)하여 분명치 못하거나 궁구하여도 끝까지 모를 일이 아니다. 옛 사람의 말에, 「화와 복은 자기 스스로가 구하지 않는 것이 없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열 집만이 사는 고을에도 반드시 충신(忠信) 한 사람은 있다.」 하였으니, 이제 대마도 한 섬 사람에도 역시 다 하늘에서 내린 윤리와 도덕의 성품이 있을 것이니, 어찌 시세(時勢)를 알고 의리에 통하여 깨닫는 사람이 없겠는가.
병조는 글[書]을 대마도에 보내어, 나의 지극한 생각을 알려서, 그 자신(自新)할 길을 열어 멸망의 화를 면하게 하고, 나의 생민(生民)을 사랑하는 뜻에 맞도록 하라.’ 하였다. 이제 선지(宣旨)로써 일의 마땅함을 자세히 알게 하노니, 오직 족하(足下)는 잘 생각하라."
하고, 귀화한 왜인 등현(藤賢) 등 5인에게 이 글을 가지고 대마도로 가게 하였다.
○上王命兵曹判書趙末生, 致書于對馬島守護都都熊瓦曰:
本曹啓奉宣旨, 若曰; "天之生斯民也, 氣以成形, 理亦賦焉, 而作善則降之百祥; 作不善則降之百殃。 古昔帝王奉若天道, 敎民稼穡, 樹藝五穀, 以養其形。 因其固有之義理, 而開道之, 以淑其心, 若有强梗不率, 殺越人于貨, 愍不畏死者, 小則刑戮, 大則征伐, 堯、舜、三王, 君人之道, 如是而已。 對馬爲島, 隷於慶尙道之雞林, 本是我國之地, 載在文籍, 昭然可考。 第以其地甚小, 又在海中, 阻於往來, 民不居焉。 於是, 倭奴之黜於其國而無所歸者, 咸來投集, 以爲窟穴, 或時竊發, 刦掠平民, 攘奪錢穀, 因肆賊殺孤寡人妻子, 焚蕩人室廬, 窮凶極惡, 積有年紀。 惟我太祖康獻大王以至仁神武, 應天革命, 肇造家邦, 市肆不易, 而大業以定, 此雖湯、武之盛, 何以加哉? 國勢大張, 兵力堀阜, 穿徹海岳, 騰擲天地, 隆隆殷殷, 凡有血氣者, 莫不慴伏。
于斯時也, 命一褊將, 殄殲對馬之小醜, 有如泰山之壓鳥卵; 賁、育之搏嬰兒。 我太祖乃敷文德, 載戢武威, 示以恩信懷綏之道。 予紹大統, 莅國以來, 克承先志, 益申撫恤, 雖或間有草竊不恭之事, 尙念都都熊瓦之父宗貞茂慕義輸誠, 犯而不較, 每接信使, 館焉以留, 仍命禮曹厚加勞慰。 又念其生理之艱, 許通興利商船, 慶尙道之米粟, 運于馬島者, 歲率數萬餘石, 庶幾養其形體, 以免飢餓; 充其良心, 恥爲草竊, 竝生於天地之間也。 予之用心, 蓋亦勤矣, 不意近者, 忘恩背義, 自作禍胎, 以取覆亡。 然其平日投化及以興利通信而來者與今望風而降者, 竝皆不殺, 分置諸州, 仍給衣食, 以遂其生。 又命邊將率領兵船, 進圍其島, 以待卷土而降, 今其島人, 尙且執迷不悟, 予甚憫焉。
島中之人, 計不下數千, 思其生理, 良用惻然。 島中之地, 類皆石山, 未有肥衍之土, 稼穡樹藝, 無所施功, 將欲乘隙竊發, 盜人財穀, 蓋其平昔所作罪惡, 固已貫盈, 幽則天地山川之神, 默降殃禍; 明則良馬大船、利兵精卒, 水陸之備甚嚴, 焉往而不遭誅戮之患哉? 只有捕魚採藿買賣一事, 乃爲生理所資, 而今已背恩負義, 自絶之矣, 非予先有絶之之心也。 失此三者, 不免飢餓, 坐待死亡而已。 於此爲計, 其亦難矣。
若能飜然悔悟, 卷土來降, 則其都都熊瓦錫之好爵, 頒以厚祿, 其代官等, 如平道全例, 其餘群小, 亦皆優給衣糧, 處之沃饒之地, 咸獲耕稼之利, 齒於吾民, 一視同仁, 俾皆知盜賊之可恥、義理之可悅, 此其自新之路, 生理之所在也。 計不出此, 則卷土率衆, 歸于本國, 其亦可矣。 若乃不歸本國, 不降于我, 尙懷草竊之計, 仍留于島, 則當大備兵船, 厚載糧餉, 環島而攻之, 歷時旣久, 必將自斃。
又若精選勇士十萬餘人, 面面入攻, 則囊中之物, 進退無據, 其必孩稚婦女, 靡有孑遺, 而陸爲烏鳶之食; 水充魚鼈之腹也無疑矣。 嗚呼! 豈不深可(衣)憐也哉? 此其禍福所在, 彰彰明甚, 非茫昧不可究詰之事也。 古人有言曰: ‘禍福無不自己求之者。’ 又曰: ‘十室之邑, 必有忠信。’ 今對馬一島之人, 亦皆有降衷秉彝之性矣。 豈無知時識勢通曉義理者哉? 兵曹其移文對馬島, 諭予至懷, 開其自新之路, 俾免滅亡之禍, 以副予仁愛生民之志。" 敬此, 今將宣旨事宜, 備云前去, 惟足下其思之。
遣投化倭 藤賢等五人, 齎往對馬島。
<세종 1년 7월 17일 경신>
귀화한 왜인 등현(藤賢)이 항복 권고문을 가지고 대마도로 떠났다. 대마도는 예부터 조선의 땅이었으니 본국으로 돌아가든지 항복하라는 것이다. 위기를 느낀 대마도 도주가 도이단도로(都伊端都老)에게 신서(信書)를 보내어 항복하기를 빌고 인신(印信)을 내려 줄 것을 청원했다.
대마도를 다녀온 도이단도로(都伊端都老)가 수강궁에 무릎을 꿇고 대마도 도주의 항복을 전했다. 태종은 항복을 가납하고 교유했다.
도도웅와(都都熊瓦)가 보낸 사람 도이단도로(都伊端都老)가 대궐에 나아가 사명을 배하였다. 예조 판서 허조가 그 서신에 답하여 말하기를,
"사자(使者)가 와 서신을 받아 사연을 자세히 알았노라. 말하여 온 바 본도인(本島人)을 돌려보내는 것과 인신(印信)을 내리는 것들의 일을 삼가 아뢰어 바쳤노라. 병조 판서 신조말생이 삼가 선지를 받들었나니,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노라. 바른 덕과 진실된 마음으로 천성을 지키는 것은 생명이 있는 인간이면 다 같이 지니고 있는 바이요,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함은 사람의 마음이 다 같이 옳다고 여기는 바이다. 오방(五方)095) 의 사람들은, 그들의 언어와 풍습이 혹 다를지라도, 바른 덕과 진실된 마음으로 천성을 지키는 성품과,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는 마음은 다름이 없노라. 이제 대마도 사람들이 작은 섬에 모여들어 굴혈(窟穴)을 만들고 마구 도적질을 하여, 자주 죽음을 당하고도 기탄하는 바가 없는 것은, 하늘이 내려 준 재성(才性)이 그렇게 달라서 그런 것이 아니요, 다만 작은 섬은 대개 다 돌산이므로, 토성이 교박(磽薄)해서 농사에 적합하지 않고, 바다 가운데 박혀 있어 물고기와 미역의 교역에 힘쓰나, 사세가 그것들을 늘 대기에 어렵고, 바다 나물과 풀뿌리를 먹고 사니, 굶주림을 면하지 못해 핍박하여 그 양심을 잃어, 이 지경에 이르렀을 뿐이니, 나는 이것을 심히 불쌍하게 여기노라. 도도웅와의 아비 종정무(宗貞茂)의 사람됨은 사려가 깊고 침착하며, 지혜가 있어 정의를 사모하여, 성의를 다해 무릇 필요한 것이 있으면, 신청해 오지 않은 적이 없노라. 일찍이 진도와 남해 등의 섬을 청하여, 그의 무리들과 함께 옮겨 와 살기를 원했으니, 그가 자손 만대를 위해 염려함이 어찌 얕다 하겠느뇨. 나는 이를 매우 가상히 여겨, 막 그의 청하는 바를 들어 주려고 하였던 차에, 정무(貞茂)가 세상을 버렸으니, 아아, 슬프도다.
도도웅와가 만약에 내 인애스러운 마음을 체득하고 아비의 후세를 염려한 계획을 생각하여, 그 무리들을 타일러 깨닫게 하여, 그 땅에 사는 온 사람들이 항복해 온다면, 틀림없이 큰 작위를 내리고, 인신을 주고, 후한 녹을 나누어 주고, 전택을 내려 대대로 부귀의 즐거움을 누리게 하여 줄 것이요, 그 대관인(代官人) 등은 다 서차(序次)에 따라 작을 주고 녹을 갈라 주어 후한 예로써 대해 줄 것이며, 그 나머지 군소배(群小輩)들도 다 소원에 따라 비옥한 땅에다 배치해 주고 하나하나에 농사 짓는 차비를 차려 주어, 농경의 이득을 얻게 하여, 굶주림을 면하게 하여 주리라. 양심을 충실하게 하면, 선은 마땅히 행해야 하고, 악은 마땅히 없애야 함을 알게 되어, 전에 물들은 더러움을 싹 씻어버리고 예의의 습속으로 변하여, 무궁토록 함께 복리를 누리게 될 것이니, 훌륭하지 아니하뇨. 그러나 농사일은 미룰 수 없노라. 만약에 마음을 돌려 순종하고 농상(農桑)을 영위하기를 원한다면, 모름지기 12월에 가서 먼저 섬 중의 일 관리하는 자를 보내 와서, 내 지휘을 받도록 할지니라. 농량(農糧)·농기구·곡식 씨앗 등에 관한 일들을 미리 준비하여 두어야, 철이 되어서 부족한 일이 없게 될 것이니라. 만약에 이 때를 어기면, 후에 무리하게 둘러댈 수 없느니라. 요청해온, 전에 분치(分置)하였던 왜인 등은 다 각도에 영을 내려 의류와 양곡을 관급해 주어서 살 수 있게 하여 주고, 너희 무리들이 와서 항복하는 날 곧 완전히 모이게 하여, 이산(離散)하는 걱정이 없게 하여 주겠노라. 부자 형제로 만약에 빨리 만나기를 원하는 자가 있다면, 먼저 오는, 일 관리하는 자가 데리고 나오면 편리하리라. 아아, 문덕(文德)을 펴서 사방을 편안케 하는 것은 옛날부터 제왕의 본심이로다. 위무(威武)를 떨쳐서 순종치 않는 자를 죽여 없앰이야 어찌 원하는 바이랴. 부득이해서이니라. 예조에 영을 내려 돌아가는 사자(使者)에게 글을 부쳐, 나의 지극한 마음을 알리게 하여, 스스로 새롭게 사는 길을 열게 하여 주어, 길이 생생(生生)하는 희망을 이루게 하여, 나의 일시동인(一視同仁)하는 뜻에 맞게 하노라. 이로써 줄이노라. 이제 선지의 뜻을 갖추어 써서 돌려 보내노라. 자세한 것은 돌아가는 사자가 귀로 직접 들었노라. 족하(足下)는 잘 생각하여, 섬 중의 시세를 알고 의리를 아는 자들과 함께 의논해서 처리하면 온 섬이 다행하리라."
고 하였다.
○都都熊瓦使人都伊端都老詣闕拜辭命。 禮曹判書許稠答其書曰:
使至得書, 備詳辭意。 將所諭發還本島人及賜與印信等事, 謹以啓聞。 兵曹判書臣趙末生敬奉宣旨, 若曰: "降衷秉彝, 有生所同得; 好善惡惡, 人心所同然。 五方之人, 其言語習尙, 雖或不同, 降衷秉彝之性、好善惡惡之心則未始有異也。 今對馬島人等投集小島, 以爲窟穴, 肆爲盜賊, 屢被死亡, 無所忌憚者, 非天之降才爾殊也。 特以小島, 類皆石山, 土性磽薄, 不宜稼穡, 阻於海中, 懋遷魚藿, 勢難常繼, 率以海菜草根爲食, 未免爲飢餓所迫, 喪其良心而至此耳, 予甚憫焉。 都都熊瓦之父宗貞茂, 爲人深沈有智, 慕義輸誠, 凡有所需, 靡不申請。 嘗請珍島、南海等島, 欲與其衆遷居, 其爲子孫萬世慮, 豈淺淺哉? 予甚嘉之, 方欲聽其所請, 而貞茂捐世, 嗚呼悲夫! 都都態瓦若能體予仁愛之心, 念父慮後之計, 曉諭其衆, 卷土來降, 則當錫以大爵, 授以印信, 頒以厚祿, 錫之田宅, 俾世享富貴之樂。 其代官人等, 皆以次授爵頒祿, 待以厚禮, 自餘群小, 亦皆隨所願, 欲處之沃饒之地, 各給爲農之備, 使獲耕稼之利, 以免飢饉。 充其良心, 皆知善之當爲、惡之當去, 一洗舊染之汚, 變爲禮義之俗, 共享福利於無窮, 顧不偉歟? 然農事不可緩也。 若委心聽順, 欲爲農桑, 則須當十二月, 先遣島中管事者以來, 聽予指揮。 其農糧磁器與穀種等事, 預爲之備, 至時方無欠缺, 若違此時, 則後不可强爲之說。 所請向來分置倭人等, 竝令諸道, 官給衣糧, 以遂其生, 待汝衆來降之日, 卽令完聚, 俾無離散之憂。 其父子兄弟, 若有欲速見之者, 則先來管事者, 將帶出來, 庶爲便益。 嗚呼! 敷文德以懷綏四方者, 自古帝王之本心也, 奮威武以殄殲不率者, 豈所欲哉? 不獲已也。 下令禮曹, 書付回使, 諭予至懷, 使開自新之路, 永遂生生之望, 以副予一視同仁之意。" 敬此。 今將宣旨事意, 備書回去, 細在還使耳聞。 足下其思之, 與島中識時勢、知義理者共圖之, 一島幸甚。
— 세종실록 5권 1년 10월 18일 (기축)
도이단도로(都伊端都老)를 대마도로 돌려보낸 태종은 정벌군의 전면 철수를 명했다. 두지포에 진을 치고 있던 좌군과 우군이 철군했다. 이후 대마도는 조선의 정치질서 속에 편입되어 조선 국왕이 관직을 내려주는 통치권속에 예속되었다.[2]
결과
이 원정은 180명의 조선군이 전사하는 등 많은 인명 희생이 따랐으며 분명한 군사적 승리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원정대가 돌아온 후 다음 원정을 논의하였으나 사정상 실행에 옮길 수는 없었다. 그러나 원정 이후 대마도주(對馬島主)가 항복을 청하여 옴으로써 사태가 일단락되게 되었다. 대마도주는 또한 신하의 예로서 섬길 것을 맹세하고 경상도의 일부로서 복속하기를 청하였고, 왜구를 스스로 다스릴 것과 조공을 바칠 것을 약속하였다. 세종이 이를 허락하고 이후 삼포를 개항할 때에 대마도 도주에게 통상의 권한을 줌으로써 평화로운 관계로 전환되었다.
이 정벌 이후 상당 기간 동안 왜구의 침입을 방지하는 효과를 가져왔으며, 통상을 허락하여 일본인들로 하여금 평화적으로 무역과 내왕을 하도록하는 정책을 펼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명나라의 일본 정벌 차단
2009년 3월 19일 한국역사연구회 학술 발표회에서 ‘조선 초기 대마도 정벌의 원인과 목적’에서 기해동정이 왜구 소탕보다는 명나라의 일본 정벌을 저지하기 위한 외교 전략이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한 근거로 우선 기해동정 이전 10년간 왜구로 인한 피해가 거의 없었다는 점을 꼽는다. 고려말부터 태종 초기까지 기승을 부렸던 왜구의 침입은 태종 9년(1409)부터 크게 감소했다. 10년 만의 왜구 피해에, 그것도 대마도가 조선과의 우호적 관계를 위해 노력하던 상황에서 조선이 대규모 출병을 감행한 점은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출정 명령 4일 만에 65일분의 군량과 1만 7000여명의 병력을 준비한 대목도 이전부터 대마도 정벌을 치밀하게 계획했음을 시사한다.
조선의 피해가 뜸했던 때, 왜구의 주요 활동 무대는 명나라 연안지역이었다. 명나라는 일본 쇼군을 통해 왜구를 제어하는 방식을 취했지만 원도의에 이어 등극한 원의지가 적극적으로 협조하지 않자 일본 정벌을 계획한다. 조선은 명나라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명나라가 일본 정벌에 나서면 명나라의 관계 개선에 노력해온 태종으로선 이에 개입하지 않을 명분이나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조선은 최소한의 희생으로 전쟁을 막기 위해 결국 조선은 명나라의 일본 정벌을 막으려면 명의 왜구 피해를 줄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판단, 대마도 정벌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는 분석이다. 대마도 원정군이 대규모 부대 편성에도 불구하고 의도적으로 전면전을 회피한 것도 정벌의 목적이 왜구의 격멸이 아니라 조선의 위력을 과시하는 상징적인 공격이란 추측을 뒷받침한다. 조선은 정벌을 단행하면서도 일본과 대마도와의 관계를 극단적인 상태로까지 몰고 갈 의도는 없었던 것이다.
조선이 대마도를 정벌해 명나라의 일본 정벌을 사전에 차단하는 한편 대외 목표인 북방지역, 특히 여진으로의 진출과 영향력 확대라는 일거양득을 취했다고 파악한다. 왜구를 제어한 공로로 여진 지역의 실력행사에 대한 명나라의 암묵적 동의를 얻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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