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대통령 흉상
기념관 아래쪽에 이승만 대통령의 친필을 돌에 새겨 놓았습니다.
회진포호의 갈대
_ 건봉사
건봉사는 진부령과 거진읍 중간에 위치한 고찰이다.
인적이 뜸해 한적한 고찰이지만 여름이면 숲이 무성하고 가을이면 단풍이 아름답다.
건봉사는 금강산을 주산으로 하여 ‘금강산건봉사’라고 하는데,
금강산 자락은 미시령 북쪽에 있는 신선봉이 남단자락으로
감로봉과 향로봉을 이어 단발령까지가 휴전선 이남에 위치하고 있는데 건봉사는 감로봉 아래에 있다.
건봉사는 520년(신라 법흥왕 7년) 아도화상이 창건하고 원각사라 하였다.
758년 발진화상이 중건하고 정신, 양순스님에 의해 '염불만일회'의 효시가 된다.
염불만일회에 참여했던 31인이 아미타불의 가피를 입어 극락왕생하면서 아미타도량으로 이름을 알린다.
그리고 도선이 중수하여 서봉사, 나옹이 재중수하여 지금의 건봉사가 되었다.
1465년에는 세조가 행차하여 자신의 원당으로 삼아 어실각을 짓고,
친필로 동참문을 써 하사하면서 조선왕실의 원당으로 자리한다.
임진왜란 때는 사명대사가 승병을 기병한 곳으로 호국의 본거지였고,
승병들을 훈련시켰는데, 그들이 공양할 쌀을 씻은 물은 개천을 따라 10리를 넘게 흘러갔다고 한다.
1605년 일본에 강화사로 간 사명대사는 왜군이 통도사에서 약탈해 간
부처님 치아사리를 되찾아와 절에 봉안하게 된다.
지금도 염불전에는 부처님 진신치아사리 5과가 보관돼 있고, 일반인들에게 공개되고 있다.
조영출의 칡넝쿨 시와 노래비
조영출(1913.11~1993)은 충청남도 아산에서 출생하였다.
독립운동을 하던 아버지가 도피생활로 집안이 파산하자 어머니는 금강산 석왕사에 들어가
여승이 되었으며 5세의 어린나이의 조영출은 석왕사의 본사인 금강산 건봉사에서
중련(重連)이란 법명으로 만해선사의 상좌로 출가했다고 한다.
조영출은 자신과 처지가 비슷하게 절에 맡겨진 의병장의 후손 박설산과 조영암 등과 함께
형제처럼 지냈으며, 건봉사의 부속학교인 봉명학교에서 뒤늦게 소학교와 중학교 과정을 마치고
1931년 경성의 보성고보와 와세다대학교를 졸업했다.
193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동방의 태양을 쏘라>는 시로 등단하였으며,
이후 약 150여 편의 시와 550여 곡의 대중가요를 발표한 시인이자 작사가, 극작가로 활동하였다.
그는 1930~40년대 대중가요 작사가로 활동하며 조명암, 김운탄, 이가실, 김다인, 김운하 등의
예명을 사용하였는데, 작사를 하며 예명 '조명암'으로 활동했는데,
가수 신신애가 불러 인기를 끌었던 ‘세상은 요지경’의 원작사자이며,
고향초, 꿈꾸는 백마강, 알뜰한 당신, 선창, 낙화유수, 목포는 항구다, 바다의 교향시, 무정천리,
유정무정, 꽃피는 항구, 남행열차, 마차의 은방울, 방랑극단, 십오야타령, 어머니전상서,
울며헤진 부산항, 청실홍실, 가거라 똑딱선, 항구야 울지마라, 강원도 아리랑, 고향초,
황포돛대 등 5백여 곡에 이른다고 한다.
일제의 만주침략 이후에는 강압에 의하여 친일협력으로 돌아서서 ‘아들의 혈서’,
‘결사대의 아내’등 학도병 출병을 독려하는 노래를 작사하였으며,
해방 후 1948년 8월 월북하여 북에서 교육문화성 부상,
예술총동맹중앙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역임하며 북한의 혁명가극 창안에 참여하였다고 한다.
시인으로, 대중가요 작사가로, 희곡작가로 이름이 높았던 조영출의 이름이 공
식적으로 불려진 것은 수차례 납북 월북 문인의 작품이 해금되었으나,
북한에서 현직 각료급 인사로 있었기에 번번이 해금에서 배제되었다가
1992년에 우리나라 대중가요 1백년사를 재구성하는데 중요인물이었기에 해금되었다고 한다.
시비 ‘사랑하는 까닭’
건봉사에는 만해 한용운 스님이 머문 곳이기도 하다.
만해스님은 백담사에서 주로 머문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곳 건봉사에서도 머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시비로 알 수 있다. 커다란 바위에 새겨진 한용운의 시다.
금강갑계발상지
고성 건봉사 '금강갑계'는 1934년 당시 금강산 건봉사에서 생활하던 스님과
재가불자들 29명이 결성하여 오늘날까지 대를 이어 활동하는 모임으로
이들이 일정부분 계금을 내고 절에서 받은 찬조금을 기본금으로 삼아
계원간의 신행생활 및 친목을 위해 결성됐으며,
사찰 일은 물론 독립을 위한 군자금 마련에도 참여하였는데, 실제 독립운동가였던
금암 스님과 민족주의자 박태선씨 등이 계원으로 참여해 주도한 것이라고 한다.
고성군 지역 학교에 장학금을 지급하는가 하면 건봉사 불사에도 적극 나서고 있으며,
서울 정토사의 설산스님은 부친 박해련 씨의 활동을 계승해 금강갑계에 현재도 참여하고 있다고 한다.
불이문
1920년에 세운 것으로 강원도 문화재 자료 제35호로 지정되어 있다.
6.25 전쟁 때 유일하게 불타지 않은 일주문은 해탈의 문이라고도 하는데,
번뇌의 세계에서 깨달음의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를 뜻하는 문이다.
일반적으로 사찰에는 일주문, 불이문, 천왕문이라는 3개의 문을 두고 있는데
건봉사에는 일주문과 천왕문이 없이 불이문이 모든 3문의 역할을 다 하고 있다는 점인데
불이문을 받치고 있는 4개의 돌기둥에 사천왕상이 들고 있는 금강저를 새겨 천왕문을 대신하고 있다
건봉사 터에 남아 있는 불이문은 팔작지붕에 전면과 측면 각 1칸의 규모이다.
원통형 전면 기둥에 금강저(金鋼杵) 가운데 세 개의 가지를 가진 삼고저를 새겼다.
지붕의 네 모퉁이에 용두가 있으며, 전면에는 '불이문(不二門)' 현판이 걸려있다.
글씨는 조선 마지막 왕세자인 영친왕의 스승이자 큰 글씨를 특히 잘 썼던
근대 서화가 해강 김규진 선생이 쓴 것이다.
김규진은 창덕궁 희정당 양면 벽에 금강산만물초승경도와 총석정절경도의 벽화를 그린 사람으로
영친왕의 사부이기도 하며 우리나라에 처음 사진 기술을 도입한 어전 사진사이기도 하며
송광사를 비롯해 유명 사찰의 현판을 남기기도 했으며 우리에게 잘 알려진 화가
이응노의 스승이기도 한데 안타까운 건 일제 강점기 때 친일로 돌아섰다
천정에는 '불이문중건단청 대시주(不二門重建丹淸大施主)' '설암당봉흔(雪巖堂奉欣)'
佛紀二五五九年戊辰四月日이라 묵서로 쓰여진 현판이 있다
능파교(보물 제1336호)
대웅전 지역과 극락전 지역을 연결(현세와 미래를 연결)하고 있는 무지개 모양의 다리로,
규모는 폭 3m, 길이 14.3m, 다리 중앙부의 높이는 5.4m이다.
사적기에 따르면 건봉사는 신라 법흥왕 7년(서기 520년)에 아도 스님에 의해
원각사라는 이름으로 창건되었다. 이후 신라 말 도선 국사가 중수한 뒤
절의 서쪽에 봉황새 모양의 돌이 있다고 하여 서봉사라 하였으며,
고려 공민왕 7년(1358년)에는 나옹 스님이 중수하면서 다시 건봉사라 이름하였다.
다리의 중앙부분에 무지개 모양의 홍예를 틀고 그 좌우에는 장대석으로 쌓아서 다리를 구성하였는데,
홍예는 하부 지름이 7.8m이고 높이는 기석의 하단에서 4.5m이므로, 실제 높이는 조금 더 높다.
조선 숙종 34년(1708)에 건립된 경내 불이문 옆의 '능파교신창기비'에 의하면
이 다리가 숙종 30년(1704)부터 숙종 33년(1707)사이에 처음 축조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후 영조 21년(1745)에 대홍수로 붕괴되어 영조 25년(1749)에 중수하였고,
고종 17년(1880)에 다시 무너져 그 석재를 대웅전의 돌층계와
산영루를 고쳐 쌓는데에 이용하기도 하였다.
규모가 비교적 크고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는 다리로,
축조연대와 건립자 등을 알려주는 비석을 갖추고 있어 홍예교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범종각
불이문을 지나면 왼쪽으로 솟대 모양의 돌기둥을 만나게 되는데 높이가 3m로 규모가
꽤 크며 나무가 아닌 돌로 만들어졌지만 꼭대기에 오리가 앉아 있다.
범종각안에는 불전사물(佛前四物)이 있다
법고, 목어, 운판, 범종등 불교 의례에 사용되는 의식용 법구로서,
이 네 개의 법구 모두가 절의 불전 앞에 놓여지는 까닭에 이를 불전사물이라 한다.
운판은 천(天), 법고는 지(地), 목어는 수(水), 범종은 만물(萬物)을 상징한다
폐사지에서 바라본 건봉사 가람
석주문
능파교를 되돌아와 적멸보궁으로 가는 길
도중에 돌기둥에 십바라밀의 도형이 음각되어 있는 석주문 계단을 올라가야 한다
용사활지란 용과 뱀이 사는땅 이란 뜻이고 방생장계는 방생의 영력이란 의미이다
모든 것이 더불어 사는 지역이다
두개의 연못은 아무 생각 없이 지나쳤지만
일제강점기 때 만든 일제의 흔적이라는데 사실여부는 알 수 없고 내용은 이렇다.
1911년 9월 조선총독부의 ‘조선사찰령’이 공포되면서 조선의 4대가람이자
임진왜란 당시 승병을 일으킨 호국의 성지에 친일주지의 임명을 시작으로
일본풍으로 도량을 바꾼 것으로 이 연못도 일(日)자형으로 되어 있다고 한다.
폐사지
적멸보궁에서 본 건봉사
삼성각
적멸보궁 가는 길
독성각
적멸보궁
적멸보궁 내부
건봉사 치아 진신사리에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건봉사에 봉안된 진신 치아사리는 신라시대 자장법사가 636년(선덕왕 5년) 중국 오대산에 건너가
문수보살전에 기도 끝에 얻은 진신사리 100과중 일부로 자장법사는 643년 귀국하여
이 사리들을 통도사, 월정사, 법흥사, 정암사, 봉정암에 나누어 봉안하였다.
그런데 임진왜란 때 왜군들이 통도사에 난입하여 금강계단에 모셔진 사리를 탈취하여 갔는데
이후 사명대사가 일본에 건너가 통도사 사리를 되찾아왔다.
사명대사는 왜적이 파괴한 통도사 금강계단을 중수하여 사리를 다시 모셨는데
그 가운데 12과를 나누어 맨 처음 의승군을 규합하였던 인연이 있는
건봉사석가여래치상탑비 안에 봉안하였다.
1986년 6월10일, 민통선 이북지역에서 출입하기 어려운 건봉사에 도굴꾼 일당 12명이 잠입하여
금속탐지기로 문화재의 유무를 확인한 다음 13일 아침 2시간에 걸친 도굴 끝에
치아사리를 훔쳐갔는데 도굴꾼들 꿈에 부처님이 나타나 “사리를 돌려주라”고 꾸짖자
7월14일 일당 들은 서울 봉천동 모 호텔에 찾아가 훔쳐간 사리 12과 가운데
8과를 맡겨놓고 달아났다고 한다. 그러나 나머지 4과는 공범 중 한 명이 달아나는 바람에
아직까지 행방을 알 수가 없으며 되찾은 8과를 건봉사 측은 3과는 적멸보궁 석탑에
나머지 5과는 법당에 봉안하였다.
치아사리는 세계에 15과뿐인데 건봉사에 12과 스리랑카(불치사)에 3과가 보관된
희귀한 보물이라고 한다. 오래 되어 보이는 진신사리탑을 보자 마치 ‘스투파’가 연상되었다.
사면으로 건물이 성처럼 둘러쳐져 있어 꼭 방에 들어온 느낌이다. 팔작지붕을 한 작은 건물이다.
법당 뒤벽면을 터서 유리로 처리하여 뚫린 창을 통해 범종형 진신사리탑이 눈에 들어온다.
사리를 봉안한 사리탑, 석가여래영아탑봉안비, 석가여래치상입탑비 등이 자리하고 있다.
그런데 좌측으로 또 다른 탑이 있고 우측으로는 비석과 다른 석탑이 있다.
적멸보궁 석탑과 다른 탑을 나란히 세우는 것은 사리탑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하는데 이해가 안되는 사항이다
봉서루와 석주
'금강산건봉사'라는 현판을 단 봉서루 앞 계단 좌우에 있는 두 개의 돌로 만든 석주.
일제강점기 조선불교를 장악하기 위해 호국사찰의 상징이던 건봉사를 일본풍의 사찰로 바꾸기 위해 세웠던
일재의 잔재 중 하나인 십바라밀 석주(十波羅蜜 石柱).
석주에는 도형이 음각돼 있는데, 한 개에 다섯 개씩 모두 10개의 문양을 새겼다.
돌기둥에 새겨진 문양이 궁금증을 자아낸다. 이는 십바라밀 석주다.
건봉사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다. 바라밀은 보살의 수행을 의미한다.
십바라밀은 대승불교의 기본 수행법인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의 6바라밀에다
이를 보조하는 ‘방편, 원, 력, 지’가 더해진 것이다. 좌우 각각 5개의 문양이 새겨져 있다.
1.원월(圓月)-보시바라밀을 나타낸다.
2.반월(半月)-지계바라밀을 나타낸다.
3.신날(鞋經)-인욕바라밀을 나타낸다.
4.가위(剪子)-정진바라밀을 나타낸다.
5.구름(雲) - 선정바라밀을 나타낸다.
6.금강저(金剛杵)-지혜바라밀을 나타낸다.
7.좌우쌍정(左右雙井)-방편바라밀을 나타낸다.
8.전후쌍정(前後雙井)-원바라밀을 나타낸다.
9.고리두테(卓環二周)-역바라밀을 나타낸다.
10.성중원월(星中圓月)-지바라밀을 나타낸다.
대웅전
현판은 마니산인 전정우의 글씨다
1950년 5월 10일, 폭격으로 소실되었던 건봉사의 대웅전. 1957년 군부대 안에 지어졌다가
1994년에 헐고 다시 지었고 석가모니부처님과 협시 보살님이 봉안되어 있다.
진신사리를 봉안한 사찰은 우리나라에 더러 있으나, 부처님 치아사리를 봉안한 곳은 건봉사가 유일하다.
이 사리는 사명대사에 의해 이뤄졌다.
636년(선덕왕 5년) 자장법사는 중국 오대산 문수보살전에 기도를 올리고
진신사리 100과를 얻게 된다. 643년 귀국, 통도사 등 5대 적멸보궁에 나누어 봉안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통도사에 모셔진 사리를 왜군들에게 탈취 당하고 만다.
사명대사는 잡혀간 포로 송환 등의 문제로 일본으로 가게 되고, 그때 되찾아오게 된다.
그 가운데 12과를 건봉사에 봉안하였으나, 이후 도굴꾼에 의해 잃게 되고,
우여곡절 끝에 8과를 찾아, 3과는 적멸보궁 석탑에 5과는 법당에 봉안하여 참배토록 하고 있다.
아직도 4과의 사리는 행방이 묘연하다. 치아사리는 세계에서 15과 뿐인데
건봉사에 12과 스리랑카(불치사)에 3과가 보관된 희귀한 보물이라고 전해진다.
만일염불원(萬日念佛院)
대웅전 밑 측면에 있는 석가세존 진신치아사리 친견장이다
염불만일회(念佛萬日會)가 처음 시작한 건봉사에는 ‘등공대(騰空臺)’란 곳이 있다.
민통선 철조망 안에 있어서 자유로이 가 볼 수 없는 곳이기 때문에 안내자의 도움이 필요한 곳이다.
안내표지판 설명에 따르면 서기 758년 수행승 31명과 신도 1,820명이 이곳 건봉사에서
‘아미타만불염불회’를 결성하였다고 한다. 만일동안 아미타불 정근을 하며 수행하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만일은 얼마나 긴 시간일까? 일년이 365일이므로 만일은 27년이다.
만일 동안 스님들과 신도들이 수행정진한 결과 모두 아미타불이 계시는 극락정토에 태어났다고 한다.
그런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 등공대이다.
건봉사에서 등공대로 가려면 산길을 약 20여분 걸어 올라가야 한다.
등공대가 민통선 안에 있기 때문에 군부대의 협조를 받아야만 올라 갈 수 있다.
개별행동은 되지 않고 단체로 올라가야 한다.
명부전
2001년 초에 신축되었다는 명부전. 지장보살을 모신다
한국전쟁 때 건봉사 일대에서 16차례의 전투가 있었고, 폭격 등으로 건봉사는 초토화되었고,
당시 전사한 250명의 호국영령 영가가 모시며 매년 6월 6일 현충일에 위령재를 모신다고 한다.
대웅전 내부.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문수보살님과 보현보살님
장독대
민통내부에 있어 가보지 못했습니다. 10명이 넘어야 갈 수 있다고
건봉사 들어가는 길의 노송 군락
봄을 준비하는 건봉사의 목련
집사람인데 너무 머네
용대리에 왔습니다. 점심먹고 서울로 출발.
'개인산행및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 2016년 12월 3일~4일(토-일요일) 북부동해 여행(1) (0) | 2016.12.05 |
|---|---|
| 2016년 12월 3일~4일(토-일요일) 북부동해 여행(2) (0) | 2016.12.05 |
| 2016년 10월 22일(토) 운악산 산행(1) (0) | 2016.10.23 |
| 2016년 10월 22일(토) 운악산 산행(2) (0) | 2016.10.23 |
| 2016년 10월 8일(토요일) 설악산 십이선녀탕 산행 (0) | 2016.10.13 |